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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브문화 자료실

러시아의 슬라브문자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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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4-01 14:37 조회1,3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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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슬라브문자 도입

기독교의 수용에 의한 고대 불가리아어의 창제와 발전은 9세기 후반인 863년부터 시작된 슬라브어 문어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슬라브어 문자(고대 불가리아어)의 창제와 발전은 모라비아 공국을 기점으로 시작되어 불가리아에서 10세기 무렵에 꽃을 피우게 된다.
8세기 무렵에 아시아계 유목민이었던 원시 불가리아 민족과 합해져 불가리아 민족을 형성한 슬라브인들은 그들의 고유의 언어, 즉 구어를 가지고 있었다. 이 언어는 862년 무렵에  끼릴-메포지 형제에 의해서 일종의 문어로 창제되고, 그리스어로부터 각종 교회 서적을 번역하는 데 이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끼릴이 발명한 이 최초의 슬라브 문어는 고대 교회슬라브어(церковнославянскийязык), 또는 고대 불가리아어(древный бульгарский язык)라고 불리었다. 그런데 이 언어는 그리스어 초서체 소문자(Minuscules)에서 영향을 받은 글라골문자(глаголица)라는 문자로 표기되었으며, 당시 살로니카(Salonica), 즉 오늘날의 그리스 북부 데살로니키 지역의 방언에 기초하고 있었다.
863년 모라비아 공국의 로스찌슬라프 황제(Ростислав, 846-870)는 이미 기술한 것처럼 당시에 강성했던 고대 불가리아 왕국을 견제하고 자국 내에서 독일 사제들의 영향력을 줄이며, 민중이 슬라브어로 예배를 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슬라브어로 포교할 수 있는 사제를 모라비아에 파견해 줄 것을 비잔틴의 총주교 포티(Fotij)에게 요청하게 된다. 이러한 모라비아 황제의 요청에 따라 끼릴과 메포지 형제가 적임자로 선발되는데, 이들은 이미 슬라브어 방언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동생인 꼰스딴찐, 즉 끼릴의 학문적 식견이 뛰어났으며 선교 여행을 출발하기 전에 이미 주요 교회 서적을 고대 불가리아어로의 번역을 끝낸 것으로 알려졌다 (Boeck, Fleckenstein, Freydank 1974).
이들은 자신들이 번역한 교회 서적을 가지고 모라비아 지역에서 고대 교회슬라브어로 선교 활동을 펴게 된다. 특히 당시 독일 사제들에 의해 주장된 교회 의식에서의 성 3언어설에 반대하며 슬라브어 포교에 앞장선다. 다른 한편으로 슬라브어의 기독교 국가에서의 인정을 위하여 이들은 로마로 여행을 가게 된다. 867년 말 혹은 868년 초로 알려진 이들 형제의 로마 교황 아드리안 2세(Adrian II)의 알현에서 교황은 교회슬라브어(고대 불가리아어)를 유럽의 4대 언어(Lingua quarta)로 인정하고, 이 언어로 예배를 보고 선교하는 것을 허락하게 된다. 고대 교회슬라브어가 유럽 문명권에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순간이다. 빠노니아(Panonia) 지역에서 고대 교회슬라브어에 의한 선교가 이루어진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그러나 모라비아 공국에서의 독일 사제들의 계속되는 탄압, 고대 불가리아어에 의한 선교에 우호적이었던, 로스찌슬라프 황제의 뒤를 이어 재임한 스뱌토폴크 황제의 슬라브 사제에 대한 탄압, 끼릴과 메포지 형제의 죽음 등의 이유로 이들 형제의 모라비아 선교는 20여 년 만에 끝나게 된다(863-885). 이 기간 동안 끼릴과 메포지  및 그의 제자들은 끼릴과 메포지 형제의 언어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초기 문헌들, 예를 들면 Zographensis, Marianus, Assemanianus 등 4복음서들과 사도행전, 그리고 Sinaiticum 등의 시편 문헌들을 재번역 및 재필사하는 작업에 헌신하였다. 이들이 주로 번역과 개작에 이용한 문자는 물론 글라골문자였다. 이 문자는 모라비아에서의 선교 사업 기간과 불가리아 왕국 초기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글라골문자는 그리스문자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어 시간이 흐르면서 그리스문자와 유사한 문자 체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불가리아는 이 무렵 그리스정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비잔틴 문자와 유사한 끼릴문자의 사용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슬라브어로 번역되기 이전의 원전의 성격을 지니며, 그 당시 슬라브 지식인들에게는 이미 친숙한 언어였던 그리스문자와 유사한 새로운 문자 체계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끼릴문자이다.
885년 메포지가 죽은 후 상황이 급변하여 메포지와 주요 제자들은 모라비아에서 불가리아로 피신해 오게 된다. 이러한 상황과 관련하여 고대 교회슬라브어 연구의 중심지가 모라비아에서 불가리아로 바뀌게 되고, 그 결과 고대슬라브어가 발달하였던 모라비아 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되며, 모라비아를 비롯한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지역에서 사용되던 글라골문자도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다 (Schlamstieg 1982, 6-7). 그리고 그 공백을 끼릴문자가 채우게 된다. 불가리아 시메온 치세에 그리스어 대문자에 글라골문자의 새로운 철자를 첨가하여 만든 끼릴문자는 슬라브어 문헌에 사용되었으며, 향후 러시아어 정자법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불가리아가 최초의 슬라브어 문어 창제 및 발전에 기여하는 두 번째 순간이다.
고대 불가리아어 초기의 글라골리자 문헌은 대부분 남서 불가리아 지방에 퍼져 있었다. 당시 불가리아 황제인 보리스와 시메온의 특사로서 이 지역에서는 끼릴과 메포지의 직접적 제자인 끌리멘뜨와 나움(Naum)이 활동하였다. 끌리멘뜨는 886년 오늘날의 마케도니아 오흐리드(Охрид)시 근방의 꾸즈미체바(Кузмичева)로 파견을 받게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동부의 쁘레슬라프에서는 꼰스딴찐(Konstantin), 요한 에크자르흐(Joan Ekzarh), 체르노리제츠 흐라보르(Chernorizec Hrabor), 수도사 독스(Doks), 투도르 독소프(Tudor Doksov), 수도사 그리고리(Grigorij), 수도사 요한(Joan), 시메온(Simeon) 황제 등이 문서의 필사와 재편집 작업을 끼릴문자로 하게 된다. 이 끼릴문자로 표기된 고대 불가리아어, 즉 고대 교회슬라브어가 그리스 정교와 함께 러시아의 키예프 공국에 전파된다.
물론 이 당시에 사용되는 문자로는 글라골문자와 끼릴문자가 공존하였다. 그러나 글라골문자는 끼릴문자에 의해서 빠른 속도로 축출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불가리아 제1차 왕국의 수도였던 동북부의 쁘레슬라프는 서부의 오흐리드와 더불어 당시 고대 교회 슬라브어 연구의 메카가 되었으며 끼릴-메포지 언어 전통을 여타 슬라브 민족들에게 알리는 중심지가 되었다.
흔히 고대 교회 슬라브어로 지칭되는 초기 슬라브 민족의 문어는 우선 고대 불가리아 교회의 현실적 필요성, 즉 교회 의식과 선교를 목적으로 창제되었다, 고대 교회슬라브어는 계통상 고대 불가리아어의 언어적 전통에서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이후에 이러한 문어적 전통은 여타 슬라브 국가들의 문어 형성에 근간을 이루게 된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대 불가리아를 중심으로 전성기를 구가하였던 고대 교회슬라브어는 글라골 문자를 바탕으로 한 것과 끼릴문자를 기저로 한 두 가지 문자 형태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988년 러시아의 키에프 공국에 도입된 언어는 끼릴문자를 바탕으로한 교회슬라브어였다.
988년 그리스 정교 도입과 더불어 시작된 고대 불가리아어 서적의 러시아에로의 유입은 고대 러시아어 발달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물론 블라지미르(Влалимир) 대공에 의한 기독교로의 개종 이전에도 키예프 공국 지역에서 기독교가 전파되고, 기독교 서적이 유포되었음은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서 증명되고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문어와 구어의 맥락 하에서 교회 언어와 민중 언어, 문화 언어와 생활 언어로서의 역할을 고대 교회슬라브어(고대 불가리아어)와 동슬라브어 구어 또는 고대 러시아어가 각각 담당하게 된 것은 기독교 전래 이후의 일이다. 문자의 존재는 문명화의 필수적인 요소로서 문어가 발생하기 위한 좋은 조건임이 분명하다. 게다가 러시아는 이미 발달된 민중어로 쓰인 문학 작품들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구어가 문어적으로 정제될 토양은 이미 충분히 갖추어져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고대 교회슬라브어 또는 고대 불가리아어의 고대 러시아어에 대한 영향은 초기 러시아어의 발달에 방향타와 같은 역할을 한다. 결국 러시아어 문어 전통의 확립에도 고대 불가리아어, 즉 고대 교회슬라브어가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러시아에서 고대 교회슬라브어, 즉 고대 불가리아어의 이러한 문어적 전통은 18세기 러시아 민족시인 푸시킨의 등장 이전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러시아에서 고대 교회슬라브어는 종교어로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봉건사회의 국가 이념인 기독교의 언어였다. 교회어로서 고대 교회슬라브어는 민중의 모든 계층에 접근함으로써 민중어와 종교어의 상호 침투 과정의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두 언어 사이의 상호 연관 관계는 러시아어 문어 발달사에서 주된 테마가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교회어는 항상 다듬어진 언어 형태를 가지면서 확고한 규범을 발전시킴으로써 세속적인 민중어와 구별되는 경향을 지닌다. 이러한 과정은 러시아어에서도 나타나게 되는데, 일정한 간격을 두고 민중어적인 요소와 이단적인 탈선으로 볼 수 있는 여타 규범의 불안정성으로부터 교회어를 정화하고자 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Boeck, Fleckenstein, Freydank 1974). 따라서 교회어와 민중어가 서로 다르게 전개되는 상황에 이르렀고, 의사소통 수단으로서 교회슬라브어는 이러한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에서 고대 교회슬라브어, 즉 고대 불가리아어의 문어적 전통은 18세기 러시아 민족시인 푸시킨(Пушкин)의 등장 이전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고대 교회슬라브어가 러시아 문어를 규범화 하는데 있어 하나의 표준적인 틀을 제시하였으며, 결과적으로 고대 불가리아어의 여타 슬라브권으로의 전파를 의미한다.
러시아의 기독교 수용은 러시아에서 고대 러시아어 사회의 봉건주의적인 이념을 촉진하였으며, 동시에 당시 유럽에서 가장 문명화된 국가 중 하나였던 비잔틴과의 교류를 활성화하였다. 본질적으로 종교적이었던, 비잔틴 문화는 이처럼 러시아를 포함한 주변 국가에 진보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그 결과 러시아에도 비잔틴으로부터 철학적 경향과 과학 지식이 전파되었다. 10세기 말 불가리아 왕국이 비잔틴 제국에 의해 멸망된 후, 슬라브 문화는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수도원을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하였으나, 988년 블라디미르 대공에 의해 그리스 정교회가 국교가 된 후, 키예프 공국을 중심으로 하는 러시아가 번성한 슬라브 문화의 맥을 이어가는 유일한 중심지가 되었다 (Lunt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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