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브어 문자 형성의 시대적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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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4-01 14:20 조회1,05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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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브어 문자 형성의 시대적 상황
모라비아 황제가 비잔틴 제국에 모라비아 사절단을 파견한 근본적인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점을 들 수 있다: 비잔틴 성직자들은 주민들로부터 십일조를 강제로 징수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신도들의 자발적인 기부에 의존하여 생활하였다. 동기독교 교회와 비잔틴은 그들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된 민족들이 자신의 문자를 만들어서 이것에 근거하여 민족 문화를 발전시키고 기도서를 토착어(지역 방언)로 번역하는 것, 그리고 심지어는 그리스어 대신에 이 언어들로 예배를 보는 것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장려하였다. 따라서 당연히 슬라브족 사람들은 서로마 교회보다 동비잔틴 교회에 더 매료되었다 (Истрин 2010, 10).
그러나 모라비아 황제 로스찌슬라프가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한 데에는 이 외에도 다른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강력한 비잔틴 제국과 정치적 관계를 강화하고. 특히 그 당시에 모라비아 및 비잔틴의 이웃인 불가리아와 군사 동맹 협상에 들어간 독일, 즉 프랑크 영주들의 모라비아에 대한 강화된 압박에 대항하여 비잔틴으로부터 군사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모라비아 황제의 노력이었다. 다시 말해서, 모라비아가 그리스정교를 선택한 것은 종교를 통하여 비잔틴 왕국과 유대를 강화하고 이를 통해 프랑크 왕국과 불가리아를 견제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모라비아가 사절단을 비잔틴에 파견한 것은 아마도 이러한 정치적 목적도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선교사들을 보내달라는 모라비아 로스찌슬라프의 요구는 오랜 동안 서슬라브족에 대해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려고 노력해 온 비잔틴의 이해 관계에도 부합하였다. 비잔틴 제국으로서는 계속적인 갈등을 빚어왔던 불가리아의 배후에 동맹국을 가진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러한 동맹은 비잔틴 제국에게는 또한 서로마의 세력 확장을 견제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다시 말하면, 로스찌슬라프의 요구는 9세기 중엽에 로마와의 관계가 더욱 더 적대적으로 되었던 비잔틴 교회의 이익에도 크게 부합하였다.
비잔틴 왕국이 마케도니아의 항구도시 솔루니(현재 그리스의 테살로니키)에서 태어난 꼰스딴찐(즉 끼릴)과 메포지 형제를 모라비아에 파견한 것은 이처럼 분명히 정치적인 성격을 지녔다. 꼰스딴찐과 메포지의 의미와는 별개로 사절단은 본질적으로 모라비아에서 비잔틴의 문화적 및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해야만 했다. 중세에 종교, 어떤 종교적 교리는 문화-정치적인 영향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문자의 역사를 살펴보면 거의 모든 종교적 전파는 동시에 이 종교와 연관된 문자 체계의 보급이 수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서방 그리스도교는 항상 상이한 민족들에서 라틴어와 함께 도입되었으며, 이슬람교는 아랍문자와 함께, 중동에 대한 불교의 전파는 중국의 상형문자와, 그리고 조로아스터교는 아베스타(Avesta)문자와 함께 도입되었다 (Додонов 2008).
두 형제의 ‘생애전’에 의하면 꼰스딴찐은 모라비아 사절단이 도착한 직후 슬라브어 문자를 만들었으며 그것을 사용하여 메포지의 도움으로 기본적인 기도서들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였다. 863년 여름 꼰스딴찐과 메포지는 모라비아의 수도 벨리그라드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비잔틴 선교사들인 이들 형제에게 로마의 교회 관할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관할권 아래 있는 영토에서 선교 행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상황은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심지어 문자 도입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로스찌슬라프 황제조차도 이러한 정치적 상황의 영향 아래 양보하여 모라비아에서 독일 사제들의 강화를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독일과 불가리아 연합군에게 로스찌슬라프가 패배한 864년은 더욱 그러했다. 게르만 사제들은 모라비아 왕국에서 슬라브어로 예배 보는 것이 확산되지 않도록 온갖 방해를 하였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꼰스딴찐과 메포지는 교황에게서 은신처를 찾고자 866년 로마로 여행을 감행하였다. 거기에서 수도사가 되어 끼릴이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나 869년 2월 사망하여 그곳에 묻혔다.
혼자 남은 메포지는 대주교로 임명되어 모라비아로 돌아온 후 동생과 함께 시작한 일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870년 로스찌슬라프 황제가 독일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자신의 조카 스뱌또뽈크(Святополк)에 의해서 왕좌에서 내려오게 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실제적으로 모라비아에서 모든 정치적 지지를 상실한 메포지와 그 제자들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며, 비잔틴 왕국의 영향력 증대를 경계해 온 독일 성직자들은 슬라브어에 의한 종교 의식에 반대하였다. 결국 메포지는 체포되어 수감되었으며, 2년 후 교황에 의해서 석방되어 대주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교황은 슬라브어로 예배를 보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시켰다. 이러한 금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슬라브어로 계속해서 예배를 보았으며, 그 후에 마침내 교황 8세로부터 슬라브어 예배와 슬라브어로 된 종교서적의 사용을 허락 받아 새로운 종교 서적들이 슬라브어로 번역된다.
메포지는 885년에 죽었으나 그 직전에 자신의 제자들 중에서 한 명인 고라즈다를 후계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교황 스테판 5세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슬라브어 예배를 금지시켰다. 그 후 886년에 메포지의 제자들과 후계자들에게 가혹한 압박이 가해져 슬라브어 종교 의식이 다시 게르만 성직자들에 의해서 금지되자, 그들 중 일부가 불가리아로 떠나게 되었다. 이로써 그들이 정착한 불가리아가 슬라브 문화의 새로운 중심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 결과 모라비아를 중심으로 한 중부 유럽은 카톨릭 문화의 영향을 받는 지역으로 남게 된다.
모라비아 황제가 비잔틴 제국에 모라비아 사절단을 파견한 근본적인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점을 들 수 있다: 비잔틴 성직자들은 주민들로부터 십일조를 강제로 징수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신도들의 자발적인 기부에 의존하여 생활하였다. 동기독교 교회와 비잔틴은 그들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된 민족들이 자신의 문자를 만들어서 이것에 근거하여 민족 문화를 발전시키고 기도서를 토착어(지역 방언)로 번역하는 것, 그리고 심지어는 그리스어 대신에 이 언어들로 예배를 보는 것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장려하였다. 따라서 당연히 슬라브족 사람들은 서로마 교회보다 동비잔틴 교회에 더 매료되었다 (Истрин 2010, 10).
그러나 모라비아 황제 로스찌슬라프가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한 데에는 이 외에도 다른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강력한 비잔틴 제국과 정치적 관계를 강화하고. 특히 그 당시에 모라비아 및 비잔틴의 이웃인 불가리아와 군사 동맹 협상에 들어간 독일, 즉 프랑크 영주들의 모라비아에 대한 강화된 압박에 대항하여 비잔틴으로부터 군사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모라비아 황제의 노력이었다. 다시 말해서, 모라비아가 그리스정교를 선택한 것은 종교를 통하여 비잔틴 왕국과 유대를 강화하고 이를 통해 프랑크 왕국과 불가리아를 견제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모라비아가 사절단을 비잔틴에 파견한 것은 아마도 이러한 정치적 목적도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선교사들을 보내달라는 모라비아 로스찌슬라프의 요구는 오랜 동안 서슬라브족에 대해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려고 노력해 온 비잔틴의 이해 관계에도 부합하였다. 비잔틴 제국으로서는 계속적인 갈등을 빚어왔던 불가리아의 배후에 동맹국을 가진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러한 동맹은 비잔틴 제국에게는 또한 서로마의 세력 확장을 견제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다시 말하면, 로스찌슬라프의 요구는 9세기 중엽에 로마와의 관계가 더욱 더 적대적으로 되었던 비잔틴 교회의 이익에도 크게 부합하였다.
비잔틴 왕국이 마케도니아의 항구도시 솔루니(현재 그리스의 테살로니키)에서 태어난 꼰스딴찐(즉 끼릴)과 메포지 형제를 모라비아에 파견한 것은 이처럼 분명히 정치적인 성격을 지녔다. 꼰스딴찐과 메포지의 의미와는 별개로 사절단은 본질적으로 모라비아에서 비잔틴의 문화적 및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해야만 했다. 중세에 종교, 어떤 종교적 교리는 문화-정치적인 영향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문자의 역사를 살펴보면 거의 모든 종교적 전파는 동시에 이 종교와 연관된 문자 체계의 보급이 수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서방 그리스도교는 항상 상이한 민족들에서 라틴어와 함께 도입되었으며, 이슬람교는 아랍문자와 함께, 중동에 대한 불교의 전파는 중국의 상형문자와, 그리고 조로아스터교는 아베스타(Avesta)문자와 함께 도입되었다 (Додонов 2008).
두 형제의 ‘생애전’에 의하면 꼰스딴찐은 모라비아 사절단이 도착한 직후 슬라브어 문자를 만들었으며 그것을 사용하여 메포지의 도움으로 기본적인 기도서들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였다. 863년 여름 꼰스딴찐과 메포지는 모라비아의 수도 벨리그라드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비잔틴 선교사들인 이들 형제에게 로마의 교회 관할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관할권 아래 있는 영토에서 선교 행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상황은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심지어 문자 도입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로스찌슬라프 황제조차도 이러한 정치적 상황의 영향 아래 양보하여 모라비아에서 독일 사제들의 강화를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독일과 불가리아 연합군에게 로스찌슬라프가 패배한 864년은 더욱 그러했다. 게르만 사제들은 모라비아 왕국에서 슬라브어로 예배 보는 것이 확산되지 않도록 온갖 방해를 하였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꼰스딴찐과 메포지는 교황에게서 은신처를 찾고자 866년 로마로 여행을 감행하였다. 거기에서 수도사가 되어 끼릴이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나 869년 2월 사망하여 그곳에 묻혔다.
혼자 남은 메포지는 대주교로 임명되어 모라비아로 돌아온 후 동생과 함께 시작한 일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870년 로스찌슬라프 황제가 독일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자신의 조카 스뱌또뽈크(Святополк)에 의해서 왕좌에서 내려오게 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실제적으로 모라비아에서 모든 정치적 지지를 상실한 메포지와 그 제자들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며, 비잔틴 왕국의 영향력 증대를 경계해 온 독일 성직자들은 슬라브어에 의한 종교 의식에 반대하였다. 결국 메포지는 체포되어 수감되었으며, 2년 후 교황에 의해서 석방되어 대주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교황은 슬라브어로 예배를 보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시켰다. 이러한 금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슬라브어로 계속해서 예배를 보았으며, 그 후에 마침내 교황 8세로부터 슬라브어 예배와 슬라브어로 된 종교서적의 사용을 허락 받아 새로운 종교 서적들이 슬라브어로 번역된다.
메포지는 885년에 죽었으나 그 직전에 자신의 제자들 중에서 한 명인 고라즈다를 후계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교황 스테판 5세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슬라브어 예배를 금지시켰다. 그 후 886년에 메포지의 제자들과 후계자들에게 가혹한 압박이 가해져 슬라브어 종교 의식이 다시 게르만 성직자들에 의해서 금지되자, 그들 중 일부가 불가리아로 떠나게 되었다. 이로써 그들이 정착한 불가리아가 슬라브 문화의 새로운 중심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 결과 모라비아를 중심으로 한 중부 유럽은 카톨릭 문화의 영향을 받는 지역으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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