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브어 문자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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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4-01 14:18 조회1,21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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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브어 문자의 형성
9세기 무렵 슬라브인들은 북으로 발트해에서 남으로는 아드리아해와 에게해까지 이르고, 서로는 엘베강과 동으로 중부러시아 초원 지대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이들 슬라브족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일반적으로 '슬라브어'(словенский язык)라고 한다. 그러나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방언적 차이가 별로 크지 않아 서로 의사소통에는 큰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언어 상황에서 모라비아의 황제인 로스찌슬라프(Ростислав)는 비잔틴 왕국의 미하일 3세에게 라틴어 대신 자국어로 예배를 볼 수 있도록 선교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에 비잔틴 황제는 슬라브 지역 방언에 익숙한 그리스 살로니카 지방 출신의 꼰스딴찐(Константин)과 그의 형 메포지(Мефодий)를 모라비아 공국에 파견한다. 이들은 모라비아에 도착 후 최초의 슬라브어 문자인 글라골문자를 만들어 주요 성서와 교회 서적들을 번역하였는데 이 언어가 바로 교회슬라브어(церковнославянский язык)이다. 여기에서 교회의 개념은 교리가 하나의 지침으로 수용된 광범위한 기독교 사회를 지칭한다. 따라서 교회슬라브어는 기독교화한 모든 슬라브 민족 사이에서 통용되었던 문어로서 어느 지역의 특정 방언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동발칸 지역의 슬라브어, 즉 불가리아-마케도니아어의 일반화된 형태를 의미한다 (Lunt 1974).
슬라브족에 기독교가 수용된 9-11세기에 확립된 교회슬라브어는 그 후에 슬라브어의 지역적 방언과 결합하여 각 지역의 특성을 가진 지역적 교회슬라브어로 분화된다. 따라서 러시아어판 교회슬라브어, 세르비아어판 교회슬라브어, 불가리아어판 교회슬라브어, 마케도니아어판 교회슬라브어가 되어 각 지역의 슬라브어 방언들이 문어로 규범화 되는데 언어적 기반을 형성하게 된다.
885년 메포지가 죽은 후 상황이 급변하여 슬라브인 성직자들이 대부분 모라비아에서 불가리아로 쫓겨나게 된다. 그 결과 모라비아를 비롯한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지역에서 사용되던 글라골문자도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다 (Schlamstieg 1982). 이러한 언어 상황에서 그리스의 언셜문자(uncial)를 바탕으로 새로운 끼릴문자가 창제되었다. 이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885년과 893년 사이로 추정되는데 끼릴의 제자들이 그의 종교적 업적과 명성을 기리기 위해 '끼릴'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Picchio 1980). 글라골문자가 모라비아, 마케도니아 서부, 빠노니아, 세르비아 및 크로아티아에서 사용된 반면, 끼릴문자는 주로 불가리아 동부를 중심으로 사용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고대 불가리아를 중심으로 전성기를 구가하였던 교회슬라브어는 글라골문자를 바탕으로 한 것과 끼릴문자를 기저로 한 것, 두 가지 문자 형태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988년 러시아의 키예프 공국에 도입된 언어는 끼릴문자를 바탕으로 한 교회슬라브어였다.
9세기 무렵 슬라브인들은 북으로 발트해에서 남으로는 아드리아해와 에게해까지 이르고, 서로는 엘베강과 동으로 중부러시아 초원 지대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이들 슬라브족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일반적으로 '슬라브어'(словенский язык)라고 한다. 그러나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방언적 차이가 별로 크지 않아 서로 의사소통에는 큰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언어 상황에서 모라비아의 황제인 로스찌슬라프(Ростислав)는 비잔틴 왕국의 미하일 3세에게 라틴어 대신 자국어로 예배를 볼 수 있도록 선교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에 비잔틴 황제는 슬라브 지역 방언에 익숙한 그리스 살로니카 지방 출신의 꼰스딴찐(Константин)과 그의 형 메포지(Мефодий)를 모라비아 공국에 파견한다. 이들은 모라비아에 도착 후 최초의 슬라브어 문자인 글라골문자를 만들어 주요 성서와 교회 서적들을 번역하였는데 이 언어가 바로 교회슬라브어(церковнославянский язык)이다. 여기에서 교회의 개념은 교리가 하나의 지침으로 수용된 광범위한 기독교 사회를 지칭한다. 따라서 교회슬라브어는 기독교화한 모든 슬라브 민족 사이에서 통용되었던 문어로서 어느 지역의 특정 방언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동발칸 지역의 슬라브어, 즉 불가리아-마케도니아어의 일반화된 형태를 의미한다 (Lunt 1974).
슬라브족에 기독교가 수용된 9-11세기에 확립된 교회슬라브어는 그 후에 슬라브어의 지역적 방언과 결합하여 각 지역의 특성을 가진 지역적 교회슬라브어로 분화된다. 따라서 러시아어판 교회슬라브어, 세르비아어판 교회슬라브어, 불가리아어판 교회슬라브어, 마케도니아어판 교회슬라브어가 되어 각 지역의 슬라브어 방언들이 문어로 규범화 되는데 언어적 기반을 형성하게 된다.
885년 메포지가 죽은 후 상황이 급변하여 슬라브인 성직자들이 대부분 모라비아에서 불가리아로 쫓겨나게 된다. 그 결과 모라비아를 비롯한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지역에서 사용되던 글라골문자도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다 (Schlamstieg 1982). 이러한 언어 상황에서 그리스의 언셜문자(uncial)를 바탕으로 새로운 끼릴문자가 창제되었다. 이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885년과 893년 사이로 추정되는데 끼릴의 제자들이 그의 종교적 업적과 명성을 기리기 위해 '끼릴'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Picchio 1980). 글라골문자가 모라비아, 마케도니아 서부, 빠노니아, 세르비아 및 크로아티아에서 사용된 반면, 끼릴문자는 주로 불가리아 동부를 중심으로 사용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고대 불가리아를 중심으로 전성기를 구가하였던 교회슬라브어는 글라골문자를 바탕으로 한 것과 끼릴문자를 기저로 한 것, 두 가지 문자 형태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988년 러시아의 키예프 공국에 도입된 언어는 끼릴문자를 바탕으로 한 교회슬라브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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