뾰뜨르의 문자개혁과 시민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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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4-02 21:04 조회1,14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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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뜨르의 문자개혁과 시민문자
출처: 조남신(2014), 러시아어 문자의 규범화 과정: 교회슬라브어의 러시어어화, 동서양 문자의 성립과 규범화.
18세기초에 문어의 전 체계에서 현저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 시기에 문어적 표현의 많은 낡은 수단들이 재평가 받게 되고, 고유한 러시아어에서 비롯된 요소와 서유럽어에서 차용된 새로운 요소들이 많이 도입되었다. 이 모든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변혁은 이전에는 문어에서 사용되지 않았던, 이 시기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문자의 많은 새로운 언어 수단들을 불러들였다(Ефимов 1954). 결과적으로 뾰뜨르 시기에는 외래어가 집중적으로 차용되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어휘가 풍부해지고, 과학, 기술, 문화, 사회, 공공성, 국가 조직의 발전을 촉진하는 다면적인 언어가 창조된다.
러시아사에서 18세기 초 또는 뾰뜨르 시대는 경제, 정치, 문화 분야에서 강력한 변화와 연관된 새로운 단계를 나타낸다. 뾰뜨르 대제는 절대적인 지지에 기반하여, 러시아의 후진성을 극복할 수 있는 절대 군주가 되려고 노력하면서 사회의 변화를 수행하였다. 그 결과 뾰뜨르 대제의 시기는 개혁과 변혁의 시기로서 이것은 행정 조직, 군대, 교육 방법 등 사회 전반에 이르는 광범위한 것이었다. 이 무렵에 산업 활동이 활발해지고, 수공업이 발전하고 과학과 예술 발전을 위한 많은 노력이 이루어졌다.
이 모든 변화는 투쟁 없이는 진행될 수 없었으며 변혁의 길에는 교회, 옛 것의 보존을 옹호하면서 개혁에 반대하는, 완고하고 거만한 귀족들과 함께 등장한 사제들의 오랜 관습이 장애가 되었다. 국가의 사회생활 변화와 관련하여 교회의 권위를 손상한 종교 개혁이 실행되었다. 개혁의 의미는 교회의 자율성을 빼앗기 위해 그것을 승리한 귀족 계급의 요구에 적합하도록 조정하는 데 있었다. 그 결과 교회는 평범한 통치(권력)기관으로 변화하여 자신의 권위와 국민 계몽에 대한 이전의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이러한 상황 변화로 인하여 교회슬라브어의 자율적인 존재도 상당한 정도로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Судавичене и др. 1990).
러시아 사람들의 세계관과 의식이 변함에 따라 언어도 점차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새로운 문학 장르와 그것들 가운데에서 러시아어 문어사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과학-통속적인 장르가 형성되었다. 또한 정부의 언어 정책은 본질적으로 반교회슬라브어적 방향으로 나타났다(Судавичене и др. 1990). 1708년에 문자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1710년 뾰뜨르의 명령에 의하여 교회 문학을 제외한 모든 문학에 대하여 현대적인 외형에 가까운, 새로운 문자가 도입되었다. 뾰뜨르 시대에 문어의 세속적인 문체와 교회-예배적 문체의 상호관계가 심하게 변화하게 된다. 따라서 그 당시 교회예배적 특성의 문체가 어떻게 평가되었으며 그 비중이 어땠는지를 1710년에 이루어진 문자 개혁을 통해서 판단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끼릴문자는 본격적으로 변화되어 문자의 외형이 둥그렇게 되었으며 잉여적인 문자들이 제거되었다(Ефимов 1954). 이른바 ‘시민문자гражданский шрифт’가 창제되었다. 모든 세속적인 서적들은 이 새로운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끼릴문자는 기도서들에서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끼릴문자에서 첫 번째의 급격한 변화는 뾰뜨르 대제의 시민문자의 도입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중세적 전통의 화려한 장식적 서법, 즉 장식문자를 금지하고, 러시아어 문자를 서유럽에서 사용된 새로운 서체로 조정하였다. 이 개혁은 16세기 후반에 러시아에 도입된 가동 타입의 인쇄기에서 사용될 수 있도록 문자의 모양을 고정시키고, 또한 증가하는 세속적인 텍스트에 사용될 알파벳을 간소화하려는 요구에 부응한 것이었다. 이러한 변화들은 끼릴문자를 사용하는 다른 슬라브어에도 점차적으로 전이되었다.
1710년 1월29일(2월9일)에 뾰뜨르 대제에 의해서 끼릴문자의 개혁이 시작되었다. 개혁은 국민들에게 공식적인 정보를 제공하기 위하여 다수의 교육받은 전문가와 유능한 사람들에 의한 국민적 요구에 의해서 야기되었다. 낮은 수준의 도서 출판은 이러한 목적에 장애가 되는 언어 변화들은 고려하지 않은 채, 주로 종교 서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처럼 988년 그리스 정교회와 함께 러시아에 도입된 고대 교회슬라브어의 끼릴문자는 세속적인 텍스트들에서는 어떤 문자들이 사용되지 않거나 부정확하게 사용되는데도 불구하고 18세기 말까지 여전히 형태가 낡은 고풍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필사에 적합한 문자 형태는 식별 부호의 존재로 인해 인쇄된 텍스트의 조판에는 불편하였다. 따라서 뾰뜨르 대제의 문자 개혁 과정에서는 알파벳 구성뿐 아니라 문자 형태도 바뀌었다.
뾰뜨르 대제는 알파벳과 서체의 새로운 모델을 찾는데 적극적이었다. 1701년 1월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초안에 따르면 공학자인 꿀렌바흐는 러시아 알파벳의 33개의 소문자와 4개의 대문자(А, Д, Е, Т)를 스케치 하였다. 이 도면은 문자 제작을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보내졌다. 동시에 뾰뜨르 대제의 명령 하에 모스크바 인쇄소는 문자 주조 작업을 수행하였다. 뾰뜨르 개혁의 결과 러시아어 알파벳에서 문자의 숫자가 38개로 줄었으며, 그 서체는 더 간단하고 더 둥글게 되었다. 대문자와 구두점의 용법은 합리화되었으며 아라비아 숫자가 이전의 문자로 된 숫자를 대치하였다.
새로운 시민문자에 의해 인쇄된 책들은 교회-기도서(종교서적)들과는 분명하게 구별된다. 이러한 경계 설정은 서체적 관계에서뿐 아니라 언어-문체적 관계에서도 이루어졌다. 세속적인 문자는 교회문자와는 현저하게 달라져서 표준적 표현의 수단과 규범의 관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확보하게 된다. 반면에 교회-신학적 특성을 나타내는 문학의 문체들은 뾰뜨르 시대 이후에는 문어 발전의 최고의 전성기에 관찰되었던 그러한 영향력을 더 이상 세속적인 문체에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문자 개혁은 러시아어 문어 발달 과정에서 서체에 대한 문제를 훨씬 뛰어 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새로운 세속 문자의 창제는 교회-신학적인 문학으로부터 세속적인 문학의 심한 단절을 의미했다(Ефимов 1954). 문자 개혁은 때때로 문어의 자유로운 발전을 저해하는 속박으로 변화했던, 옛 전통적인-문어적 규범으로부터 세속적인 문자를 해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하였다.
17세기와 1730년경까지의 뾰뜨르 대제 시대는 러시아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이룬다. 수공업의 발달, 국가 조직의 혁신, 학교의 설립 및 서유럽과의 적극적인 교류는 그 당시 사회의 인식을 변화시키면서 러시아어 문어 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로써 러시아어어의 발달 과정에서 17세기에 옛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Boeck, Fleckenstein, Freydank 1974). 이 시기의 새로운 전형적 요소의 탄생은 이미 17세기 후반에 나타난 현상이다. 상용어의 기능 범위 확장과 폴란드어 및 폴란드어를 통한 기타 유럽어들로부터 간접 차용의 출현이 특수한 현상이다.
뾰뜨르 대제 시기의 일반적인 특징으로는 교회슬라브어와 상용어(생활어) 사이의 본질적인 위치가 바뀌어 새로운 문어 형태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문어에서 우월적 지위를 나타내는 형태인 교회슬라브어의 위상은 계속하여 약화되었고, 역사적으로 상용어체 및 관용어체의 토대 위에서 발달한 언어 유형, 즉 민중어 또는 생활언어가 그 기능 범위를 확장시켰다. 이러한 과정은 단순히 하나의 유형이 단순히 다른 유형으로 대치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언어의 요소, 즉 구어체 러시아어와 교회슬라브어 및 독일어와 프랑스어 등 서유럽의 수많은 어휘들을 선택하고 혼합하는 오랜 과정을 나타낸다. 이렇게 서로 다른 언어 요소들이 정적으로 통합된 것은 뿌쉬낀의 작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뿌쉬낀을 러시아어 문어의 기초를 형성한 작가로 평가한다.
출처: 조남신(2014), 러시아어 문자의 규범화 과정: 교회슬라브어의 러시어어화, 동서양 문자의 성립과 규범화.
18세기초에 문어의 전 체계에서 현저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 시기에 문어적 표현의 많은 낡은 수단들이 재평가 받게 되고, 고유한 러시아어에서 비롯된 요소와 서유럽어에서 차용된 새로운 요소들이 많이 도입되었다. 이 모든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변혁은 이전에는 문어에서 사용되지 않았던, 이 시기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문자의 많은 새로운 언어 수단들을 불러들였다(Ефимов 1954). 결과적으로 뾰뜨르 시기에는 외래어가 집중적으로 차용되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어휘가 풍부해지고, 과학, 기술, 문화, 사회, 공공성, 국가 조직의 발전을 촉진하는 다면적인 언어가 창조된다.
러시아사에서 18세기 초 또는 뾰뜨르 시대는 경제, 정치, 문화 분야에서 강력한 변화와 연관된 새로운 단계를 나타낸다. 뾰뜨르 대제는 절대적인 지지에 기반하여, 러시아의 후진성을 극복할 수 있는 절대 군주가 되려고 노력하면서 사회의 변화를 수행하였다. 그 결과 뾰뜨르 대제의 시기는 개혁과 변혁의 시기로서 이것은 행정 조직, 군대, 교육 방법 등 사회 전반에 이르는 광범위한 것이었다. 이 무렵에 산업 활동이 활발해지고, 수공업이 발전하고 과학과 예술 발전을 위한 많은 노력이 이루어졌다.
이 모든 변화는 투쟁 없이는 진행될 수 없었으며 변혁의 길에는 교회, 옛 것의 보존을 옹호하면서 개혁에 반대하는, 완고하고 거만한 귀족들과 함께 등장한 사제들의 오랜 관습이 장애가 되었다. 국가의 사회생활 변화와 관련하여 교회의 권위를 손상한 종교 개혁이 실행되었다. 개혁의 의미는 교회의 자율성을 빼앗기 위해 그것을 승리한 귀족 계급의 요구에 적합하도록 조정하는 데 있었다. 그 결과 교회는 평범한 통치(권력)기관으로 변화하여 자신의 권위와 국민 계몽에 대한 이전의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이러한 상황 변화로 인하여 교회슬라브어의 자율적인 존재도 상당한 정도로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Судавичене и др. 1990).
러시아 사람들의 세계관과 의식이 변함에 따라 언어도 점차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새로운 문학 장르와 그것들 가운데에서 러시아어 문어사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과학-통속적인 장르가 형성되었다. 또한 정부의 언어 정책은 본질적으로 반교회슬라브어적 방향으로 나타났다(Судавичене и др. 1990). 1708년에 문자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1710년 뾰뜨르의 명령에 의하여 교회 문학을 제외한 모든 문학에 대하여 현대적인 외형에 가까운, 새로운 문자가 도입되었다. 뾰뜨르 시대에 문어의 세속적인 문체와 교회-예배적 문체의 상호관계가 심하게 변화하게 된다. 따라서 그 당시 교회예배적 특성의 문체가 어떻게 평가되었으며 그 비중이 어땠는지를 1710년에 이루어진 문자 개혁을 통해서 판단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끼릴문자는 본격적으로 변화되어 문자의 외형이 둥그렇게 되었으며 잉여적인 문자들이 제거되었다(Ефимов 1954). 이른바 ‘시민문자гражданский шрифт’가 창제되었다. 모든 세속적인 서적들은 이 새로운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끼릴문자는 기도서들에서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끼릴문자에서 첫 번째의 급격한 변화는 뾰뜨르 대제의 시민문자의 도입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중세적 전통의 화려한 장식적 서법, 즉 장식문자를 금지하고, 러시아어 문자를 서유럽에서 사용된 새로운 서체로 조정하였다. 이 개혁은 16세기 후반에 러시아에 도입된 가동 타입의 인쇄기에서 사용될 수 있도록 문자의 모양을 고정시키고, 또한 증가하는 세속적인 텍스트에 사용될 알파벳을 간소화하려는 요구에 부응한 것이었다. 이러한 변화들은 끼릴문자를 사용하는 다른 슬라브어에도 점차적으로 전이되었다.
1710년 1월29일(2월9일)에 뾰뜨르 대제에 의해서 끼릴문자의 개혁이 시작되었다. 개혁은 국민들에게 공식적인 정보를 제공하기 위하여 다수의 교육받은 전문가와 유능한 사람들에 의한 국민적 요구에 의해서 야기되었다. 낮은 수준의 도서 출판은 이러한 목적에 장애가 되는 언어 변화들은 고려하지 않은 채, 주로 종교 서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처럼 988년 그리스 정교회와 함께 러시아에 도입된 고대 교회슬라브어의 끼릴문자는 세속적인 텍스트들에서는 어떤 문자들이 사용되지 않거나 부정확하게 사용되는데도 불구하고 18세기 말까지 여전히 형태가 낡은 고풍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필사에 적합한 문자 형태는 식별 부호의 존재로 인해 인쇄된 텍스트의 조판에는 불편하였다. 따라서 뾰뜨르 대제의 문자 개혁 과정에서는 알파벳 구성뿐 아니라 문자 형태도 바뀌었다.
뾰뜨르 대제는 알파벳과 서체의 새로운 모델을 찾는데 적극적이었다. 1701년 1월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초안에 따르면 공학자인 꿀렌바흐는 러시아 알파벳의 33개의 소문자와 4개의 대문자(А, Д, Е, Т)를 스케치 하였다. 이 도면은 문자 제작을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보내졌다. 동시에 뾰뜨르 대제의 명령 하에 모스크바 인쇄소는 문자 주조 작업을 수행하였다. 뾰뜨르 개혁의 결과 러시아어 알파벳에서 문자의 숫자가 38개로 줄었으며, 그 서체는 더 간단하고 더 둥글게 되었다. 대문자와 구두점의 용법은 합리화되었으며 아라비아 숫자가 이전의 문자로 된 숫자를 대치하였다.
새로운 시민문자에 의해 인쇄된 책들은 교회-기도서(종교서적)들과는 분명하게 구별된다. 이러한 경계 설정은 서체적 관계에서뿐 아니라 언어-문체적 관계에서도 이루어졌다. 세속적인 문자는 교회문자와는 현저하게 달라져서 표준적 표현의 수단과 규범의 관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확보하게 된다. 반면에 교회-신학적 특성을 나타내는 문학의 문체들은 뾰뜨르 시대 이후에는 문어 발전의 최고의 전성기에 관찰되었던 그러한 영향력을 더 이상 세속적인 문체에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문자 개혁은 러시아어 문어 발달 과정에서 서체에 대한 문제를 훨씬 뛰어 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새로운 세속 문자의 창제는 교회-신학적인 문학으로부터 세속적인 문학의 심한 단절을 의미했다(Ефимов 1954). 문자 개혁은 때때로 문어의 자유로운 발전을 저해하는 속박으로 변화했던, 옛 전통적인-문어적 규범으로부터 세속적인 문자를 해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하였다.
17세기와 1730년경까지의 뾰뜨르 대제 시대는 러시아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이룬다. 수공업의 발달, 국가 조직의 혁신, 학교의 설립 및 서유럽과의 적극적인 교류는 그 당시 사회의 인식을 변화시키면서 러시아어 문어 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로써 러시아어어의 발달 과정에서 17세기에 옛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Boeck, Fleckenstein, Freydank 1974). 이 시기의 새로운 전형적 요소의 탄생은 이미 17세기 후반에 나타난 현상이다. 상용어의 기능 범위 확장과 폴란드어 및 폴란드어를 통한 기타 유럽어들로부터 간접 차용의 출현이 특수한 현상이다.
뾰뜨르 대제 시기의 일반적인 특징으로는 교회슬라브어와 상용어(생활어) 사이의 본질적인 위치가 바뀌어 새로운 문어 형태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문어에서 우월적 지위를 나타내는 형태인 교회슬라브어의 위상은 계속하여 약화되었고, 역사적으로 상용어체 및 관용어체의 토대 위에서 발달한 언어 유형, 즉 민중어 또는 생활언어가 그 기능 범위를 확장시켰다. 이러한 과정은 단순히 하나의 유형이 단순히 다른 유형으로 대치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언어의 요소, 즉 구어체 러시아어와 교회슬라브어 및 독일어와 프랑스어 등 서유럽의 수많은 어휘들을 선택하고 혼합하는 오랜 과정을 나타낸다. 이렇게 서로 다른 언어 요소들이 정적으로 통합된 것은 뿌쉬낀의 작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뿌쉬낀을 러시아어 문어의 기초를 형성한 작가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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